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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서울 4대 궁 1탄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by 판다롱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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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다롱입니다.

서울 4대 궁궐 첫 번째 경복궁입니다.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 전기에 창건되어 정궁으로 이용된 궁궐. 정궁. 사적입니다.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입니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 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궐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궁성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말합니다. 경복궁의 궁성은 1389년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때 궁성문인 건춘, 광화, 영추문도 세워졌습니다. 이 보다 뒤에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도 갖추어졌습니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전면 좌우 끝에는 각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종 년간 경복궁 중건 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앞부분이 헐려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습니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입니다.

경복궁(사적 제117호)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각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습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 마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습니다. 또한 문루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축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광화문

 

 

 

◈흥례문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어구는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 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흥례문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입니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입니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습니다.

근정전(국보 제223호)

 

 

 

◈편전

편전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입니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입니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정전(보물 제 1759호)

 

 

 

◈수정전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대에 집현전이 위치한 궐내각사 지역에 고종대에 새로 지은 전각입니다. 고종대 초기에는 임시로 편전의 역할도 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수정전(보물 제1760호)

 

 

 

◈강녕전, 교태전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 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입니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입니다.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경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이 있습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

 

 

 

◈자선당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과 비현각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에 와서 창건됩니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 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습니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습니다.

자선당

 

 

 

◈경회루

경회루는 침전 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입니다. 외국 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 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경회루 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

 

 

 

◈향원정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입니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습니다.

향원정(보물 제1761호)

 

 

 

◈태원전

경복궁의 서쪽 일대는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들이 있을 대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입니다. 나중에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습니다.

태원전

 

 

 

◈건청궁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입니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합니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습니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지었습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습니다.

건청궁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입니다. 고정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 사신 접견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의 글씨를 집자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왼쪽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건춘문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입니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입니다.

건춘문

 

 

 

◈영추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습니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입니다.

영추문

 

 

 

◈신무문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입니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입니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외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습니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 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습니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입니다.

신무문

 

 

 

◈동십자각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입니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습니다. 동십자각은 서섭 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버렸습니다.

동십자각

 

 

 

문화재청 경복궁

 

www.royalpalace.go.kr

출처 : 문화재청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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