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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대 궁 3탄 <조선시대의 궁궐,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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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다롱입니다.

서울 4대 궁궐 세 번째 창경궁입니다.

 

조선시대의 궁궐,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입니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입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조 2년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습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입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에 재건된 건물입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을 만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홍화문(보물 제384호)

 

 

 

◈옥천교

1484년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습니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국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갑니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옥천교(보물 제386호)

 

 

 

◈명정문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입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습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 열의 주열에는 각 칸마다 2매씩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포작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입니다. 인종이 1544년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1484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명정전(국보 제226호)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습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8년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문정전

 

 

 

◈숭문당

순문당은 글자 그대로 문(文)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국왕의 경연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습니다. 숭문당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순조 때 환재로 불탄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하였습니다.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입니다. 일감재자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숭문당

 

 

 

◈빈양문

명정전 뒤쪽에는 빈양문이 있는데, 이 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입니다. 빈양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인 양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입니다.

빈양문

 

 

 

◈함인정

함인정 자리에는 1484년 인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습니다. 그 후, 함인정은 1633년에 건립되었고, 1830년에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습니다. 함인전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19세기 궁궐기록화인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습니다.

함인정

 

 

 

◈경춘전

경춘전은 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입니다.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중건되었습니다.

경춘전

 

 

 

◈환경전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족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종 때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에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합니다.

환경전

 

 

 

◈통명전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입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습니다.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습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됩니다.

통명전

 

 

 

◈양화당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습니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입니다.

영춘헌
집복헌

 

 

 

◈풍기대

풍기대는 영춘헌과 집복헌 뒤 언덕 위에 세워져 있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입니다. 풍기는 풍신기라고도 합니다. 1770년에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되었다가 해방 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풍기대(보물 제846호)

 

 

 

◈성종대왕 태실 및 성종대왕 태실비

성종의 태를 묻어놓았던 태실과 그 제작과 수리 기간을 적은 태실비입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명당지를 찾아 태항아리를 묻어 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실 가족의 태실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이봉하였습니다. 이때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대왕의 태실 석물을 1928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성종태실 및 태실비

 

 

 

◈춘당지

이 연못은 춘당지라 부르는 연못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연못이 전부 춘당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습니다. 1909년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재조성 한 것입니다.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 춘당지로, 백련지/백련담 등으로 부른 기록도 있습니다.

춘당지

 

 

 

◈팔각칠층석탑

춘당지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팔각칠층석탑이 보입니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있습니다. 기단은 사각형의 지대석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팔각칠층석탑

 

 

 

◈대온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입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형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습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입니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습니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온실(등록문화재 제83호)

 

 

 

◈관천대

문정전 앞쪽에 있으며,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를 설치했던 시설로 보입니다. <서운관자>에 '관천대는 천문 기상을 관측할 때 소간의를 그 위에 설치하므로 소간의대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어 간의를 설치한 시설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시간을 측정하던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던 시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제 때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것을 창경궁 정비 사업 대 제자리로 옮겼습니다.

관천대(보물 제851호)

 

 

문화재청 창경궁

안녕하십니까. 창경궁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 창경궁관리소는 선조들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뿐 아니라, 풍요로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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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재청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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