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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서울 4대 궁 2탄 <조선시대의 궁궐, 창덕궁>

by 판다롱 202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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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다롱입니다.

서울 4대 궁궐 두 번째 창덕궁입니다.

 

조선시대의 궁궐, 창덕궁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입니다.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 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하을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입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 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습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습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합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습니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궐내각사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습니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는 약방, 옥당, 예문관이 서편에는 내각, 봉모당, 대유재,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재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습니다.

궐내각사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에 지나가는 명당수 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 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금천교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입니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습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입니다.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습니다. 1045년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에 재건, 1803년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릅니다.

인정전(국보 제225호)

 

 

 

◈선정전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습니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 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습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입니다.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직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입니다.

희정당

 

 

 

◈대조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입니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입니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습니다. 이건 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습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입니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대조전(보물 제816호)

 

 

 

◈낙선재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든 해에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습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북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한 집이었습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현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습니다.

낙선재(보물 제1764호)

 

 

 

◈부용지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습니다. 300평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습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입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생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입니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부용정(보물 제1763호)

 

 

 

◈애련지

1692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습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습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습니다.

애련지

 

 

 

◈존덕정, 폄우사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릅니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습니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 지붕의 날렵한 모습입니다. 1664년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

존덕정
폄우사

 

 

 

◈옥류천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릅니다. 1636년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입니다. 

옥류천

 

 

 

◈연경당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준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경에 창건했습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납니다.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듭니다.

연경당(보물 제1770호)
선향재

 

 

 

창덕궁 - 세계유산

 

www.cdg.go.kr

출처 : 문화재청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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