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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정보

우리의 잊지 말아야 할 역사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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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다롱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조상님들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면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립니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이어 미국 주도로 UN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UN군이 파병되었습니다. UN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6.25전쟁 / © Parsecboy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습니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습니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 처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 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 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 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 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 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UN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UN 한국 임시 위원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UN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 단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북한 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습니다.

 

1948년 2월 26일 UN 소총회는 UN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의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UN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 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 선거에 의하여 북한 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UN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 © US Navy
인천상륙작전 / © Nutter (Army)

 

 

 

<6.25 전쟁 결과>

6.25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인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전쟁 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한국과 UN 참전국 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 인구비례에 의한 주유 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 / © U.S. Department of Defense

 

 

 

출처 다음 백과, 나무 위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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