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강정보

3.1절(삼일절) 의미, 배경, 독립운동가

반응형

3.1절(삼일절)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한국의 국경일입니다. 양력 3월 1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였던 날입니다. 한국의 5대 국경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에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국경일 명칭을 '독립선언일'이라 칭하였으며, 3월 1일 '대한인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로 내무부 포고를 공포하였습니다.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은 상해 올림픽극장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광복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온 민족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자 축제의 날이었으며, 중국, 미주 등의 해외 동포들 또한 3.1절이 되면 다양한 행사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습니다.

 

 

 

<3.1 운동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각국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데 뜻을 모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여러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커다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독립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속속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국내에서는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등이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본 도쿄 한가운데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 선언'을 했습니다. 선언서를 각국 대사관과 조선 총독부, 일본 언론에게 공식적으로 보냈고,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일본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했지만, 국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본의 수도 한가운데에서 이런 용감한 선언을 한 것에 감동받았습니다. 이 일은 3.1 운동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1 운동 주요 인물>

◆유관순-3.1 만세운동의 상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은 충청남도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유관순이 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에 고종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백성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참다못한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했고, 3월 1일에는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만세운동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총독부는 모든 학교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을 전했습니다. 유관순은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밤새 태극기를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날이 밝자 동지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우내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유관순을 따라 다 같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유관순은 주동자로 몰려 체포된 뒤 고문을 당했습니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일본 경찰에 대항했습니다. 유관순은 3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졌습니다.

 

유관순은 그 어떤 고문도 꿋꿋이 참아 냈지만, 결국 19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차디찬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의 애국심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뒤 1962년에 유관순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습니다.

 

 

 

안중근-제국주의 심장을 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열네 살 때 프랑스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안중근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으로 남포에 학교를 세우고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를 길렀습니다.

 

얼마 뒤 우리나라의 군대마저 해산되자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범윤과 함께 대한 의군을 조직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를 타고 만주에 간다는 정보를 얻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 역으로 갔습니다.

 

10월 26일 아침, 역에는 일본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국의 높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기자로 변장하고 구경꾼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권총을 꺼내 총을 쏘았습니다. 총알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안중은 그 자리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안중은 뤼순 감옥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는 내내 안중근은 조국의 주권을 빼앗은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자를 대한 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총살했다고 자신의 뜻을 떳떳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해 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꿋꿋하고 당당하며 논리 있었는지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들도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옥중에서 안중근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일본을 꾸짖으며 오직 나라의 미래만을 걱정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 절대 시신을 국내로 옮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수들과 사형 집행자들까지 감동할 정도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구-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김구는 어릴 적 가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신분 차별을 하지 않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교리를 가진 동학을 접한 뒤 동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학 혁명에도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동학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구는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이듬해 귀국길에 김구는 우연히 국모를 죽인 일본 헌병을 만나 살해했습니다. 일본은 그 죄를 물어 김구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김구는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버텨냈습니다.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다. 어찌 하늘이 나를 돕지 않겠느냐. 국모를 죽인 원수는 내 죽어서도 꼭 갚으리' 이렇듯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늘 당당한 김구의 모습에 일본인마저 감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구가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김구가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 후 김구는 비밀 독립 단체인 신민회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붙잡혀 고문을 받았고, 1914년 감옥 사이에서 풀려난 김구는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동지들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습니다.

 

1940년에는 일본군과 싸울 광복군을 조직해 중국 내에 있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해 오자 김구는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큰 실망감을 맛보았습니다. 김구가 귀국했을 때 역시 걱정했던 대로 우리나라는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 네 나라에 의해 5년간 신탁 통치되도록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에 반대해 남북통일 정부를 세우도록 남북 협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협상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1948년에는 남한에서 선거가 치러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뒤 계속 통일 운동을 펼치던 1946년 6월 26일,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습니다.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런 세계정세는 우리나라의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191년 2월 8일 일본 도교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을 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도 독립 선언을 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습니다. 1910년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에서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일을 앞둔 3월 1일에 독립 선언을 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손병희와 권동진 등 천도교 측 15명, 이승훈과 길선주 등 기독교 측 16명, 한용운과 백용성 등 불교 측 2명이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 서명했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기념식이 자칫 폭력시위로 변할 것을 걱정해 종로에 있는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습니다. 그러고는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민족 대표 33인 명단>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반응형